14. 전근

2022. 7. 23. 02:41내 이야기

나이를 먹었다고 크게 생각해보지 않았었는데 언제부턴가 몸에서 하나 둘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안경 너머로 스마트폰 글자가 잘 안보여 안경을 올리고 스마트폰을 보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손톱을 깎는데 돋보기가 있어야 수월했다. 몸에 변화가 오면서 내 나이도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만으로도 반백년을 살았고 큰애는 1년 휴학을 하고도 올해 대학교 4학년으로 취업을 앞두고 있다. 이젠 2학기가 되니 내가 다니는 회사에 이력서라도 내 볼 요량으로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써 보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그만큼 나이를 먹긴 했다. 같은 일을 하는 후배 여사원이 88년 생이라고 한다. 마냥 어리게만 생각했는데 30대 중반이라고 한다.

나이를 먹으니 회사에서의 대우도 전만 같지 않다. 수 년 동안 받아온 보너스가 사라진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젊은 친구들을 중점적으로 케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으로 오십이 넘으면 정리 대상에 들어간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나처럼 조직책임자도 아니라면 그 대상에 들 것이 분명했다. 모 전무님과 만나서도 넌지시 여쭤보니 틀린 소문은 아니었다. 그래도 난 한때는 잘 나가서 실장까지도 달았었는데 팀장도 내 놓고 이제는 팀원이다. 그러니 정리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아무리 실적이 뛰어나다 한들, 젊은 인재들을 쓰겠다고 하면서 노땅들을 내 치는게 생리이니 별 수 있는가 싶다.

여기서 하는 일은 정말 좋다. 난 지금 10여년 손을 놓고 있던 소프트웨어 개발을 다시 하면서 해외연구소를 관리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소프트웨어는 나와 컴퓨터와 대화를 하는 것이니 다른 사람이 끼어들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어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오는 스트레스가 없어서 너무 좋다. 게다가 해외 연구소는 우리가 프로젝트를 주고서 관리를 하는 것이다보니 갑의 위치에 서 있다는 장점도 있다. 하는 일도 좋고 같은 팀 사람들도 천상 엔지니어들이라서 같이 일을 하기에 참 좋다. 스트레스가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전에 하던 프로젝트 관리나 수주 업무에 비해서는 천국이 따로 없을 정도고 업무량도 많지 않아서 야근이나 휴일근무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게 간사해서 회사가 돌아가는 사정이며, 각종 프로젝트의 상황을 모두 꿰차고 있다가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하는 조직에서 있자니 좀이 쑤시는 것도 사실이긴 했다. 그리고 비지니스라는 전쟁에 앞장서고 싶은게 내가 원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는데 한발 뒤에 물러서 있다보니 그때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실력은 모자라긴 하지만 개발업무는 나와 잘 맞았다. 새로운 언어도 배웠다. 회사에서 보는 소프트웨어 인증 시험 준비도 조금씩은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개발을 하면서 정년까지 갈 수 있다면 그대로 남아 있고 싶다는게 식구들에게도 얘기했던 내 진심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이로 인해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회사를 그만두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나를 많이 흔들었다.

개발로 오게 된 것도 어찌보면 모시고 있던 분이 자매사로 전근을 가시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 조직을 신임 상무 한 분이 맡게 되면서 내가 설 자리가 없어졌다. 당시는 주재원에서 돌아와 만 3년 정도를 쉬지도 않고 달릴 만큼 달렸기 때문에 지쳐있었기도 했다. 한동안 매달 유럽으로 출장을 갔었고, 중간에는 개발팀을 병행해서 맡기도 했다. 유럽 출장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나 싶었는데 다음은 중국으로 한달이 멀다하고 다녀야 했다. 사람이 없다고 업무 구걸도 해 가면서 업무 공백을 메꾸느라고 참 많이 뛰어다녔다. 그렇게 지쳐갔었나보다.

그러다가 모시던 분이 다른 곳으로 가시게 되면서 원래 내가 하던 분야로 돌아갈 기회가 생겨서 지금의 팀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보람은 있었지만 힘들고 어렵고 사람을 지치게 하는 일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10여년만에 원래 하던 분야로 돌아와 나름 기분이 좋았다. 일도 좋고 팀 분위기도 좋았다. 그렇게 적응을 할 무렵, 모시던 분께서 같이 일을 해 보자고 넌지시 제안을 해 오셨다. 처음에는 내가 하는 일을 설명드리면서 가타부타 답변을 드리지 못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몇 안되는 VP급 중의 한 분이었고 나를 인정해 주고 뒷배가 되어 주셨음에도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내 마음을 기울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같이 통근버스를 타던 선배님 세 분 중에서 두 분이 갑자기 회사에서 사라진 것이었다. 나름 회사에서 높은 분 밑에서 주요 업무를 했던 분들이었기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 당장 내년에는 내게 닥칠 일이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설사 내년을 잘 넘긴다고 해도 매년 그 살얼음 위를 걷기가 두려웠다. 그럴 즈음 연락을 받은게 다시 한번 같이 일을 해 보자는 것이었다. 내가 이동을 수락한다고 해서 100%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도를 해 보자고 했다. 같은 그룹사지만 프로세스가 있어서 한쪽에서 안 보내준다고 하면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부정이 아닌 무언의 긍정으로 일은 시작되었다.

한달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묻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일을 했다. 한동안 그랬다. 그런데 저쪽 HR에서 우리 HR로 이동 요청을 보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래서 진행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우리쪽의 의견은 어떤 것인지를 묻기 위해 HR 팀장에게 전화를 했다. 안면이 있었기에 내 이름을 밝히고 어떻게 진행이 되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정상적인 프로세스가 아니라서 정상적인 프로세스를 따라달라고 요청을 했고 지금은 피드백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사실 양쪽에서 말이 달랐다. 필요한 쪽에서 잘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신경을 끄고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쪽에서는 보내는 것이 탐탁치 않은 것 같긴 했다.

상무님께서 전화를 하셨고 팀장급을 데리고 있으면서 케어를 해 주지 않을꺼면 보내달라고 직접적으로 HR 팀장과 면담을 해 보라고 했다. 맞는 말이긴 했다.
사실 연구소장이 나를 극도로 싫어한다. 잘못해서 혼이 났다거나 어떤 징계를 받은 사실도 없는데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한다. 공식 회의상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놀랄만큼 싫어한다. 이유는 전혀 모른다. 이유라도 알면 죄송하다고 말이나해 볼텐데 말이다. 어느날 아침 회사에 출근을 해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대우도 못 받으면서 여기에 붙어있어야 하나? 불러주는데로 가서 일을 하는게 더 낫지 않은가? 최소한 인정은 못받더라도 미움을 받지는 않을 것 아닌가?" 라는 생각말이다. 지금의 팀이 아니라 모 연구소장 때문에 든 생각이다.
사실 나를 불러주시는 상무님은 나와 코드가 맞았고, 내 뒷배가 되어 주셨다. 그래서 모시고 있을때, 내가 희망하던 주재원을 몇 번이고 신청을 해주시고 추천도 했었다. 그런데 번번히 낙방을 했다. 아쉽고도 고마웠다. 내 경험과 역량을 보고 추천을 해 주시는게 고마웠다. 안되는 것은 내 실력이고 운이라고만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침을 먹으면서 든 생각은 그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개발쪽으로 오면서 전무님과 면담을 할 때, 주재원 말씀을 드렸고 경험이 있으니 기회가 있으면 추천을 해 주시겠다고 선뜻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달 전에 들려온 얘기는 다음과 같았다. 전무님께서 나를 추천했는데 젊은 인재를 보내라고 공식 석상에서 얘기가 나왔다는 것이다. 당시에 난 내 나이 탓을 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회사의 넘버3가 추천을 해서 보내겠다고 하는데 그걸 자를 수 있는 사람은 연구소장을 포함해서 단 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침을 먹다가 욕이 나올 뻔했다.

그렇게 난 이동을 하는 쪽으로 한발 더 마음이 기울었으나 HR간에 협의가 되어야 이동을 할 수 있었다. 안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마음 편하게 있기로 했다. 여기 남아 있으면 조금 일찍 회사를 그만 둘 수도 있다는 것 이외에는 여기가 더 좋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든 것이 사실이다. 아는 사람도 많고 일도 나름 적응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가는가 싶더니 갑작스레 팀장이 연락을 해 왔다. 전무님이 내가 이동하는 것에 동의를 하셨다고 말이다. 얼떨결에 인수인계 날짜를 잠시 상의했다. 사실 난, HR에서 먼저 면담을 하자고 연락을 할 것으로 예상을 했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조직을 이동한다고 하면 이유라도 물어볼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HR에서는 본인에겐 연락도 한번 없이 그냥 위에 말씀드리고 이동을 시키는구나 싶었다. 여기서 15년 가량을 열심히 일을 했는데 이동하는 사유조차 물어보지도 않는 HR이 제대로 일을 하는 것인지, 정말 구성원을 생각하는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이동이 확정되었다.

마지막으로 인수인계 기간이 2개월이라는 말을 듣고 잠시 놀라서 경황이 없이 오늘 하루를 보냈다. 내가 한 일에 대해서 진행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인수인계 기간을 정하다보니 빚어진 헤프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각조각 구현해 놓은 사항을 하나로 합치면 되는 사항이기 때문에 결국엔 차주에 내가 해 놓은 것들을 데모로 해 주기로 했다. 데모 후에 다시 이동 일정을 다시 잡기로 했다. 아마도 한달 후에는 이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가 많이 그리울 것이고 사람들이 많이 생각날 것 같다. 하지만 살아보니 그건 나만의 생각이다. 내가 떠나고 나면 사람들에게서 바로 잊혀지게 될꺼다. 살아보니 그렇더라.
그렇게 생각해 주고 편의도 봐주고, 돌봐주고 해도 몸이 멀어지면 마음은 더 멀어지더라. 원래부터 남남이었으니 그러려니 해야 한다. 시원 섭섭하다는 말이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가끔 밖에서 지나다 만나면 웃으면서 잘 지내냐고 인사할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사무실이 바로 옆 건물이니 말이다.

내가 직접 가겠다고 얘길해서 진행 되는게 아니라 사업부장 레벨에서 자매사 전출을 요청한 것이기는 했지만 인사팀에겐 서운한 마음이 너무나 컸다. 15년여를 비지니스 키우느라 고생을 했는데 왜 전출을 가려하느냐는 말 한마디 듣지 못했다. 이것 저것 물어볼 것이 있어서 전화를 했는데 굳이 만날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자매사간 이동에 대한 모든 프로세스가 끝이 났다고 다 됐다고 연락이 왔다. 그런데 웬걸.....여기선 퇴사 프로세스응 밟아야 한단다. 불과 4일을 남겨두고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부랴부랴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면서 모든 프로세스를 끝낼 수 있었다. 역시나 회사에 정붙이면 안되나보다. 정내미가 떨어졌다. 그렇거나 말거나 다시 볼 일 없는 인간들이거니 했다.

14년 2개월을 일한 회사는 그렇게 드럽고 치사한 회사로 내 기억에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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