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 22. 18:15ㆍ일상 (대만 생활 정착기)
옛날 기억이기만 하다. 아마도 2003년 말에서 2004년 초의 일이니까 말이다. 그때 기억은 이렇다. 당산역이 보이는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토익 공부를 하고 있었다.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어두었고 선선했다. 또 다른 기억은 일산을 지난 어디쯤이다. 봉고버스에 몸을 싣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기억은 분당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택시안이다. 택시를 탈 때 기사님께 팜플렛 같은 것을 보여줬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대리운전을 할 때의 기억이다. 2000년대 초반이니 아마도 지금과 같은 대리운전이 태동하는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어떻게 연락을 해서 시작을 하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회사에서 월급이 밀리면서 생활은 해야겠기에 택한 것이 대리운전이었다. 당시 내 상황을 설명하자면 좀 길다. 회사를 옮기는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96년 2월에 첫 직장에 입사를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는데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상태에서 덜컥 취업을 했다는 것이다. 병역특례병으로 뽑혔던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병역특례 업체로 신청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학생 신분이 아니니 영장이 나올 것이 뻔했다. 그래도 회사에선 내가 필요했는지 야간에 대학원을 다니라고 했다. 덕분에 회사를 병역특례 업체로 등록하는 일까지도 해야 했다. 이 이야기만 해도 사연이 많지만 여기서는 그냥 넘어간다. 기회가 있을 때, 다른 제목으로 써 봐야겠다. 어찌저찌해서 병역특례 회사를 만들어 3년짜리 특례를 하려고 했더니 석사 과정을 밟고 있으면 안된단다. 별수 없이 석사 병역특례인 전문연구요원 등록을 추가로 하고 나서야 내 군대 문제는 해결이 되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60개월을 회사에서 일을 하면 병역을 마친 것으로 처리되는 것이다. 그때 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필요한 각종 프로그램도 개발을 하고 네비게이션도 개발을 했더랬다. 천상 소프트웨어 개발자였다. 전자계산학과를 졸업하고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일은 재미가 있었다. 공장의 관리 프로그램에서 부터 네비게이션까지 정말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할 기회가 주어졌다. 6~7년은 재미있게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빠져서 살았다. 그러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생겼다.
그런데 어느날 회사에서 소프트웨어 개발 사업을 접는다고 했다. 내 설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나한테는 개발 대신에 영업을 하라는 업무 지시가 떨어졌다. 청천벽력이었다. 회사를 그만두면 바로 군대를 가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영업에 뛰어들었다. 회사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병무청에 알려져도 난 군대를 가야했다. 일을 하면서도 가시방석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호시탐탐 이직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특례 복무 중인 사람은 병역특례 업체로만 이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쉽지가 않았다. 여러군데 이력서를 넣었다. 그런데 직접 지원을 했었던 회사들에서는 모두 낙방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된 헤드헌터를 통해서 연봉도 천만원 이상 올려서 이직을 한 것이다.
회사를 옮겼을 때는 뛸 듯이 기뻤고, 작지만 기업부설 연구소 소장이라는 직함도 받았다. 하지만 문제는 석달 뒤에 터졌다. 급여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애는 유치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생활비가 당장 없었다. 병역특례가 아직도 6개월 정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회사를 때려칠 수도 없었고 6개월도 남지 않은 병역특례를 뽑아 줄 회사도 없었다. 사장은 이미 서류상 이혼을 하고 재산을 옮겨 놓은 상태라 급여를 받을 방법이 없었다. 당장은 먹고 살아야 했다. 병역특례를 마치지 않았고 월급은 나오지 않지만 회사는 다녀야 했기에 낮에는 사무실에 나가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밤에 할 수 있는 일을 찾다보니 그게 대리운전이었나보다.
기억의 단편을 더듬어 보면 난 어느 아파트 상가 2층의 사무실에 있다. 여사장과 그의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있다. 사장이 나에게 일에 대해서 설명을 해 줬다. 나중엔 대리운전 찌라시를 꽤 많이 받았다. 지금처럼 핸드폰 앱으로 대리기사를 호출하는 시스템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라디오나 TV에 광고도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군문제가 걸려있었으니 사무실은 출근을 하되 할 수 있는 한 빨리 퇴근을 했다. 퇴근을 해서 간단하게 뭔가 먹었을 것 같고 바로 활동무대인 당산쪽으로 차를 끌고 이동을 했다. 7시가 채 안되서 도착을 하면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돌아다니며 차 와이퍼에 찌라시를 꼽았다. 다른 찌라시가 있으면 빼내고 우리껄로 바꿨다. 사람들 눈치도 보이고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잽싸게 꼽고 다녔다. 그렇게 그날 받은 찌라시를 대충 돌리고나면 이젠 기다려야한다. 차에서 있는 시간엔 토익책을 폈다. 할일이 없어서 편 것이 아니고 영어 점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영어는 한 마디도 못했지만 이직을 하기 시작하면서 영어의 중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영어 성적이 없었다. 이직에 필요한 토익 성적이 없었다. 한 번도 토익시험을 치러본 적이 없으니 점수가 없는게 당연했다. 사실 대리 운전을 시작하기 바로 직전에 시험을 한 번 보긴 했다. 토익이 뭔지도 모르고 사 놓은 책을 열어 듣기와 읽기라는 종류의 두 유형이 있더는 것만 보고 시험 접수를 하고 시험을 봤다. 말이 시험이지 그냥 찍는 수준이었다. 연습문제라도 시간을 재가며 풀어 봤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 듣기 기험은 시간 조절을 할 팔요가 없으니 어쨌거나 다 풀었다. 읽기는 시간 배분을 못해서 거의 절반을 찍고 말았다. 성적은 475점. 처참한 결과다. 이직 기준이 당시에 경력직은 600에서 650점은 최소 되어야했다. 그래서 영어에 목을 맨 것이다. 영어가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콜을 기다리며 책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내가 콜을 받으면 내 뒤에 있는 사람이 차를 끌고 나를 따라왔다. 그리곤 날 픽업해서 다시 원 위치로 돌아왔다. 차를 가지고 출근한 이유는 그거였다. 얼마나 그랗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다음 기억부터는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처음 겪는 일이다보니 여러 기억의 단편들이 있다. 차들에 대한 느낌도 기억이 난다. 내 차는 IMF때 중고로 업어온 무쏘 602EL 이었다. 그리고 다른 차는 레간자 정도만 운전을 해 본게 전부였다. 다양한 차들을 몰아봤을텐데 기억에 남는 차는 몇 종 되지 않는다. 그 중에 가억에 남는 건 세 종류의 자동차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카니발이다. 일산 저 멀리까지 갔었는데 무쏘와 같은 디젤인데 이렇게 차가 잘 나갈 수가 있구나. '차가 정말 가볍게 나가는구나' 라는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음은 에쿠스다. 자동차 키가 접히는 것도 몰라 쩔쩔매기도 했는데 이 차는 정말 조용하다는 느낌으로 기억된다. 비오는 날이었는데 휠하우스에 빗물튀는 소리가 운전석에선 크게 느껴졌다. 운전석에서 이 정도 소음이라면 '뒷자리는 정말 조용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 자동차는 투스카니인지 티뷰론인지 모르겠지만 스포츠카 타입의 수동이었다. 거의 누워가는 수준에 기어봉은 엄청나게 높여놨고 클러치는 어찌그리 깊던지. 나중에라도 스포츠카는 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런데 나중에 우연한 기회에 벤츠 컨버터블을 타보니 좋더라.
길지 않은 대리운전기사 생활이었지만 기억에 남는 사람들도 몇 몇 있다. 봉고차로 시흥까지 갔었다. 술을 많이 드시지 않은 분이 술집에서 나오셨고 콜을 받은게 아니라 우연히 눈이 맞아서 가게 된 경우였다. 사무실에 떼어주는 것 없이 모든 수입이 내 것이 되는 케이스였다. 4만원을 받았던 것 같다.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술을 많이 하시지 않아 이런 저런 얘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다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대중 교통이 이미 끊긴 상황이었고 새벽 첫 차가 운행하기까지는 두 시간 정도 남은 그런 애매한 시간이었다. 택시를 타고 오게 되면 번 돈 보다 지출이 많아지는 상황, 별 수 없이 버스 정류장에서 첫차가 올 때까지 기다렸었다. 지금 생각하면 추억일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기분이 좋았던 상황에서 처량한 처지가된 더러운 상황이었다.
다음은 드라마에서나 볼 듯 한 갑질 상황, 에쿠스를 타고 목동 14단지 쯤으로 기억되는 곳으로 갔는데 돈이 없다고 자기 집으로 따라오라고 해서 올라갔더니 마누라한테 돈을 받아선 위로 집어 던진 그런 경험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별 더러운 놈도 다 있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앞에서 찌라시를 보여주고 택시를 탄 경험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건 일종의 신분 확인이었다. 분당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도로 변에서만 경험할 수 있었던 그런거다. 서울서 분당까지 택시가 가게 되면 손님을 태워서 서울로 올라올 수가 없기 때문에 빈차로 올라올 수 밖에 없다. 그때 대리 기사를 태우는거다. 대리기사에게 당시 인당 5천원을 받고 목적지는 무조건 강남역 근처에 떨궈주는거였다. 최대 4명까지 태울 수 있으니 택시기사들은 대리기사들 때문에 수입이 줄었다고 투덜대면서도 우리를 태울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대리기사를 판별하는 것이 찌라시를 가지고 있느냐 였다. 택시를 타기 전에 주머니에서 찌라시 뭉치를 꺼내서 보여줬었다.
몇 개월을 대리기사로 보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다만 병역특례 60개월 중에서 2개월인가 단축되서 특례 복무가 만료되었고 밀린 월급은 다 받지는 못했지만 노동청에 진정을 해서 다만 얼만가를 받고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불과 3개월 정도 채 근무하지 못하긴 했지만 잠시 기쳐 갔던 미디어포트라고 기억되는 회사로 입사를 했다. 직장 생활 중 최악의 기간이 그렇게 끝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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