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이 쓰리다

2022. 2. 26. 02:21일상 (대만 생활 정착기)

오랜만에 혼자서 영화를 봤다. 코로나 때문에 극장엘 가지 못하니 컴퓨터로 새벽 한시가 넘은 시간까지 영화를 봤다. 그러다 문득 요즘 회사에선 어떤 얘기가 돌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영화를 보다 말고 블라인드 앱에 접속을 했다. 영화가 별로 재미없어 잠이 오던차에 접속을 한건데 잠을 확 깨게 만든건 저성과자들에 대한 명예퇴직과 이를 거부했을 때 받게되는 교육인 성과향상 프로그램에 대한 얘기였다. 블라인드의 글 중에서는 성과가 그리 나쁘지 않은 동료 중에서도 명퇴를 종용받는 친구들이 있다는 얘기 까지도 보였다. 모두가 인건비를 줄여보겠다는 심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내 성과가 과거에 어땠는지를 먼저 확인했다. 움찔했던가보다. 다행히도 아직까진 고성과자에 속하는 것 같긴하다. 그럼에도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이제 막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막내 놈은 대학 등록금을 나라에서 대 준다고는 하지만 그 위 둘째도 겨우 중2다. 앞으로 10년은 더 직장생활을 해야한다. 모아놓은 돈도 별로 없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갑자기 막막해지는 기분이다. 앞으로 최소 2년 동안은 괜찮을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지금하고 있는 프로젝트로 보나 과거 평가를 보나 말이다.
회사에 너무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니다. 솔찍하게 얘기해서 회사에서 고쳐야 할 부분이 너무나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분명 비용을 꽤나 줄일 수 있다. 그런데 개뿔도 모르는 비 전문가 양반들이 임원 놀음하면서 모든 것을 망쳐 놓고도 본인들이 뭘 잘못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이 사태가 갑갑하기만 하다. '다른 계열사도 이렇게 방만할까?'라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한다. 선무당이 사람잡고 쓸데 없는 중복투자와 필요없는 일들, 잘못된 선택으로 줄줄이 새 나가는 비용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다는게 갑갑스러울 뿐이다. 알면서도 이런저런 관계 때문에 건드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게 한국 재벌의 문제점이기도 할꺼다.

하긴 그 덕분에 나같은 사람이 괜찮은 평가와 평판을 받아가며 일을 하고 있기도 하다. 요즘 내가 하는 개발일 이외에 추가로 하고 있는 일이 그렇다. 소위 프로그램 매니저로 본사와 해외 지사간의 개발 업무를 관리하는 것이다. 문제는 나라는 존재가 있을 필요가 없다는거다. 개개인의 엔지니어가 영어로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면 되는데 그게 안된다는 것이다. 영어 이메일 가지고서는 다들 일을 잘한다. 영어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서로 의사 표현을 하고 이해하는것은 최소한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 스피킹이 안된다. 영어 이메일로 커뮤니케이션은 되는데 말이 안되서 내가 할 일이 생긴다. 내 영어도 정말 전투 비지니스 영어인데 팀 내에서는 네이티브급으로 생각해 준다. 자막없이 미국 영화도 못보는 실력인데 말이다. 양념을 쳐서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을 포장해 보자면 경력을 기반으로 프로젝트를 해외지사와 잘 관리한다는 것이다. 사실을 알고 보면 쥐뿔도 없는데 말이다. 덕분에 난 이 팀에서 2년째 잘 나가고 있다. 물론 이 일 이외에 갸발 업무도 병행하고 있다. 그러니 변명을 하자면 나름 월급받는 만큼은 일을 하긴 한다는 얘기다.
뭐 이런 것 말고도 회사에 대한 얘기를 하라면 한도 끝도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다. 회사를 그만두게되면 회사 관련한 얘기나 써보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돈 벌이가 될랑가는 모르겠다.

 

젊은 친구들 중에서는 본인도 명퇴를 하고 싶다는 얘기를 하는 친구들이 있다. 몇 년치 연봉을 준다니 그걸 기반으로 해서 이직을 준비해 볼 심산인 것이다. 아직 어린 친구들 생각이라 마음 같아선 댓글을 달아주고 싶었다. 역지사지로 생각을 해 봐야하는데 그걸 못하는 것이다. 내가 기업에서 경력사원을 채용하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 보자. 누가 명퇴해서 집에서 놀고 있는 사람을 뽑겠는가 말이다. 설사 실력이 좋아보인다고 한들, 뭔가 결함이 있어서 명퇴를 당했겠지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게 인지상정인걸 왜 모르나 싶다. 회사를 옮길 생각이 있다면 명퇴때 받을 위로금 생각하지 말고 옮기는게 만수무강과 정신건강에 이롭다. 혹시나 이직할 곳이 정해진 다음에 운 좋게 명퇴를 하라고 한다면 위로금 받고 잠시 쉬었다가 이직을 하면 모를까 말이다. 

 

차분히 생각해보면 명퇴를 하는 회사에 서운한 것 보다는 내 나이가 벌써 명퇴 대상에 들어갈 나잇대가 되었다는게 슬픈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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