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차게 프랑스 르노로 첫 출근을 했다. 내가 가진 미션은 고객과의 접점에서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객이 미팅을 요청을 할 때는 바로 대면 미팅을 할 수 있어야 했다. 이것이 프랑스에 주재원을 보낸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 이건 모든 자동차 회사들이 특히 타국의 회사와 일을 할 때 바라는 바다. 왜냐하면 아무래도 의사소통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영어 문화권이 아닌 프랑스 같은 나라는 더욱 그렇다. 양쪽 모두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서로 소통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번 상상을 해 보시라. 프랑스의 비음이 잔뜩 들어간 영어 발음 말이다. 미국식 영어에 길들여져 있던 나에겐 처음엔 외계어 처럼 들리기 까지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잘 못하는 영어로 회의실에 같이 앉아서 얘기를 하면 엔지니어링적인 내용은 어렵지 않게 서로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물론 말로 서로 안통할 때는 바디 랭귀지도 했고 그래도 안되면 화이트보드에 그리고 써가면서 설명을 하고 설명을 들으며 의사소통을 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우리 사무실은 법인 한켠에 책상을 놓고 일을 하게 된 것이 아니라 르노 내부에서 같은 프로젝트를 하는 친구들 옆에 빈자리에 앉아서 일을 주로 하게 되었다. 그렇게 메뚜기를 하던가 비지니스 센터라고 하는 방문객들이 잠시 일을 보는 곳으로 출근을 해서 일을 봤다. 한국에서는 외주 직원들이 우리 회사에 들어와 일을 하기도 했다. 나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분들은 자리를 할당받고 아이디카드를 받아서 우리와 같은 사무실에서 같이 일을 했었다. 하지만 난 매일 같이 방문자 신세였다. 임시 아이디 카드도 없어서 매일 아침 인포메이션 데스크에서 방문자 등록을 하고 아이디 카드를 받았다. 말이 아이디카드지 메인 케이트만 통과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아이디 카드였다. 그래서 같은 프로젝트에서 일하는 르노 직원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는 그네들의 사무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들고 나는 사람들이 문을 열때 살짝 끼어서 들어가야만 했다. 이런짓을 하루에도 수 없이 해야했다. 내 집없이 셋방살이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손님 이었다. 처음엔 그랬다.
그나마 나와 같이 일을 하기 위해서 사전에 채용을 한 동료 토마가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같이 차도 마시고 식사도 할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4월에서 10월 사이는 섬머타임이 시작되어 한국과 8시간 차이가 났고 그 외에는 7시간 차이가 났다. 프랑스시간 오전이 한국시간 늦은 오후가 되는 셈이었다. 그래서 미팅 시간은 빠르면 7시에서 11시 정도까지가 주를 이뤘다. 그러니 아침은 밍기적 거리거나 여유를 가지고 출근을 할 수가 없었다. 대부분 한국에서 미팅 준비를 하고 발표도 했다. 때문에 미팅에 참석해 현지서 나온 이슈를 확인 검토해서 전달을 했다. 가끔 의사 소통이 안될 때는 나서서 도와주는 역할을 했고 한국서 개발 중인 제품을 르노 직원들과 함께 테스트 하고 결과를 주는 일도 했다. 처음에 힘이 들었던 것은 한국서 협의하기 어려운 문제를 들고 고객과 협의를 이끌어 내는 일이었고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분야에 대한 미팅이 그랬다. 이과 출신이라 그러지 않았나 싶다. 곧이 곡대로 이야기 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방법도 몰랐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도 처음엔 두려웠다.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설명하다가 막히는 바람에 식은 땀을 흘리기도 꽤 했다.많지는 않았지만 간간히 신규 프로젝트 수주를 위해서 방문하는 팀들과 함께 같이 자료를 준비하는 것을 도와주고 미팅에 함께 들어가는 일도 있었다. 한국서 출장자들이 올 때면 그네들을 데리고 미팅하러 다니고 테스트도 같이 하는 일은 일상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많은 일을 했고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다녔지만 당시에는 내가 무슨 역할을 해야하는지 누구하나 명확하게 정의를 해 준 사람이 없었고 나 역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몸은 뿐만 아니라 머리까지도 경직되어 있던 시기였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고 그때까지도 난 별다른 업무지시 그러니까 프랑스에서 내가 해야할 일에 대한 정의나 가이드를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개발팀장도 잘 몰랐으니 본인이 생각하는 한도에서만 얘기를 해 줬는데 어차피 그건 내가 어느 정도 몸으로 부딪치며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 위에 상무는 내가 파견 나온다고 했을 때 그리고 파견 나올 때까지도 한번도면담이나 회의에 부르지도 않았다. 이 비지니스라는 것을 처음 해 보는 사람들 이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크게 기대할 것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쨋거나 한국에서 바라보는 나는 현지 상주 엔지니어겸 PM 즉 프로그램 매니저였다. 고객도 마찬가지로 내 카운터 파트에서는 프로그램 혹은 프로젝트 매니저로 알고 있었고 고객사 엔지니어들은 나를 상주 엔지니어로 봤다.
그런데 일은 몇 달이 지나고 내 업무가 고객사에 알려지고 이제 일을 할만하다 싶을 때 부터 불거지기 시작했다. 현업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들은 나를 같이 일하는 동료로서 대했다. 그것은 르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기대치는 자꾸 높아지기만 했다. 우리 임원급이나 실장급이 르노에서 미팅을 하려고 하니 미팅을 주선하라거나 새로운 비지니스를 만들려고 하니 르노에서 관련 담당자를 파악해서 그들의 니즈를 파악해 달라는 것이었다. 한낫 현지 상주 엔지니어로 낮춰진 내 상황을 옆에서 보고만 있었던 사람들이 이제서야 딴소리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 지위를 내가 높여야 했다. 왜냐하면 나랑 같이 일하던 엔지니어들을 만나서 일을 하는게 아니라 그위의 매니저급을 만나서 모든일을 처리해야 했는데 내가 상대하는 레벨은 엔지니어 레벨로 고착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반년을 같이 일해온 르노 엔지니어들과도 친해야 했지만 그들의 상사와도 같은 친분을 유지해야했다.이때부터 한국 동료들이 나를 상주엔지니어라고 부르는 것을 자제시키기 시작했고 잘 따라주지 않아서 짜증을 좀 내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매니저급 더 나아가 상무급들을 만나기 위해서 난 그네들의 오피스 주변에 상주하면서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가지려고 많이 노력을 했고 그렇게 그들과 한 두번씩 말 섞을 기회를 만들었다. 르노의 모 상무를 만나기 위해서 괜시리 사무실 앞을 서성이기도 했고 비서에게 농담도 던져야했다. 대부분 허탕치는 경우가 많았지만 시간을 내서 그짓꺼리를 했다. 그렇게 6개월 정도를 노력한 끝에 어느 정도 르노 사람들과 일을 하는데 있어서 안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디카드도 받아서 매일같이 방문자 등록하는 귀찮음도 사라졌고 무려 아이디카드로 르노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도 있었다. 그뿐 아니라 르노의 사내 인터넷을 쓸 수도 있어서 르노 조직도 뿐만 아니라 르노의 이메일 주소도 받았다.
1년이 되지 않아서 더 큰 발전은 직원이 나를 포함해서 셋으로 늘어났고 우리는 작은 사무실을 르노에서 차로 5분 거리에 마련할 수 있었다. 드디어 마음 편하게 다리 뻗고 일할 우리의 사무실이 생긴 것이다. 나 보다도 출장자들이 좋아했다. 항상 남의 집에 들어가 일하는 것 같아서 여러모로 불편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무실에 있는 시간 보다도 르노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미팅과 함께하는 테스트가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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