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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의 삶

삼겹살과 상테밀리옹, 그리고 그리움이 깃든 한 병의 와인

by 소혜민 2025.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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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살던 시절, 일상 속에서 가장 소소하면서도 확실한 행복 중 하나는 바로 와인을 고르는 일이었다. 마트나 작은 와인숍에 들어가면 각기 다른 향과 이야기를 품은 와인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 중에서도 내 마음을 사로잡은 와인이 있었다. 바로 Montagne Saint-Émilion — 상테밀리옹 지역에서 나는 진한 풍미의 보르도 와인이다.

상테밀리옹은 프랑스 보르도 지역의 우안(Right Bank)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지만,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상징 같은 존재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은 석회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어 포도밭에 완벽한 환경을 제공한다. 특히 메를로(Merlot) 품종을 주로 사용하는 상테밀리옹 와인은 부드럽고도 깊은 맛, 풍부한 타닌, 그리고 입안 가득 퍼지는 검붉은 과실 향이 매력적이다. 수많은 와인을 접했지만, 그 중에서도 Montagne Saint-Émilion은 유난히 따뜻하고 친근한 기억을 안겨주는 와인이다.

프랑스를 떠나고 나서는 이 와인을 다시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몇 번이고 한국의 와인샵과 온라인몰을 뒤졌지만, 역시 지역 와인의 한계일까, 상테밀리옹이라는 이름만 들어간 와인은 있어도 내가 마셨던 그 Montagne Saint-Émilion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점점 잊혀져 가는 와인이라 생각했는데, 믿기 힘든 순간이 찾아왔다.

바로 오늘, 대만의 까르푸(Carrefour) 매장에서 장을 보던 중, 익숙한 라벨이 눈에 들어왔다. ‘Montagne Saint-Émilion 2020’. 두 번, 세 번을 눈을 의심하며 바라봤다. 손에 들자마자 심장이 뛰었다. 내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바로 그 와인이었다. 프랑스에서의 일상이, 그 와인 한 병으로 다시금 내 앞에 펼쳐진 듯했다.

그 기쁨을 혼자만 누릴 수 없어, 오늘은 이 와인을 소중한 분과 나누기로 했다. 상테밀리옹 와인은 진한 고기 요리와 정말 잘 어울린다. 특히 삼겹살의 기름진 풍미와 그릴에서 구워진 은은한 불향은 이 와인의 부드러운 타닌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와인의 복합적인 과일 향과 삼겹살의 짭조름한 맛이 어우러져, 한 입 먹을 때마다 프랑스의 포도밭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하다.

Montagne Saint-Émilion은 단순한 와인이 아니다. 나에게는 하나의 추억이고, 그리움이며, 지금 이 순간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마법 같은 존재다. 와인을 마시며 나누는 대화, 웃음, 그리고 음식.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오늘 하루가 선물처럼 느껴진다.

가끔은 삶이 예상치 못한 선물을 안겨준다. 대만에서 프랑스 와인을 다시 만난 것처럼, 어쩌면 우리는 잊었다고 생각한 소중한 것들을 또 다른 시간, 또 다른 장소에서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 밤은 삼겹살과 상테밀리옹 와인 한 잔, 그리고 좋은 사람과의 따뜻한 대화로, 이국의 작은 행복을 만끽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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