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29. 09:15ㆍ일상 (대만 생활 정착기)
3.1 운동기념터 ; 보신각앞
1919년 3.1 독립만세시위의 중심지로 4.23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한성정부를 선포한 곳
보신각 터
이곳은 조선시대 도성의 문을 열고 닫는 시간과 화재와 같은 긴급 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종을 쳐서 알렸던 터다. 1396년 태조 5년 처음 설치한 종루는 옛 서울의 중심부인 지금의 인사동에 위치해 있었으나 태종 때 현 위치로 옮겼다. 도성 문을 열 때 치는 종을 파루, 문을 닫을 때 치는 종을 인정이라 했는데, 파루는 불교의 33천에 따라 33번, 인정은 별자리의 28수에 따라 28번을 쳤다. 세종 때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초대형 누각으로 지었으나 전란과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파괴와 재건을 거듭하면서 규모가 작아져 조선 후기에는 단층 전각이 되었다. 이 건물은 종고루, 종각, 인경전 등으로 불리었는데, 1895년 고종이 보신각으로 명명하였다. 1979년 세종 때의 규모에 맞춰 새 건물을 지었으며, 현재 걸린 종은 1985년에 제작한 보신각 새 종이고 옛 보신각 동종(보물 제2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Bosingak
This bell pavilion was originally built in 1396(the 5th year of the reign of King Taejo) in present-day Insa-dong, then the heart of Hanyang, the capital of the Jeseon Dynasty (present-day Seoul), and was moved to its curretn location during the reign of King Taejong(1400~1418). The Bosingak Bell was rung thirty-three times to announce paru, the opening of the city gates at daybreak and twenty-eight times to announce injeong their closure at night, according to the preailing Buddhist custom. It wa also rung to warn the populace of emergencies such as fires, etc. The bell pavilion was originally a considerabley larger structure(measuring 5 kan by 4 kan), but it was destroyed and repaired may times over the years due to wars and fires, and had become a smaller structure by the late Joseon Period. It used to be called Jonnoru, Jonggak or Ingyeongjeon, but acquired its current name Bosingak in 1895 during the reign of King Gojong. In 1979, the bell pavilion was completely restored to the large-size structure seen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In 1985, the Old Bronze Bell of Bosingak Pavilion (Treasure No. 2) was replaced with a replica and sent to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Kan : a unit of measurement referring to the distance between two columns
보신각 새종
여기 보신각에 본디 있던 옛종은 조선 세조 14년 서기 1468년에 만들어져서 처음엔 사찰에서 불사에 쓰이다가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19년 광해군 11년부터 이곳 서울 한복판에 자리하여 시민들에게 새벽과 밤을 알려왔는데 그만 일제시대에는 민족 수난의 상징처럼 벙어리가 되었었고 해방 후에야 다시 울리기 시작해서 재야에는 새해 새아침을 알리는 축복의 종으로 또한 3.1절과 8.15에는 민족의 독립을 일깨우는 광복의 종으로 계레의 가슴속에 울려 새겨지며 5백17년이란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유서깊은 옛종의 수명이 다함에 따라 그것을 영구 보존하고 이와 갈음할 새 종을 만들어야 한다는 시민의 소리가 높아지자 서울신문사의 발의로 1984년 1월 20일 보신각종 중주위원회가 발족하여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한 온국민의 성금으로 기금을 마련하는 한편 그 제작을 전문가에게 맡기어 5백40여일 만에 새종의 완성을 보아서 뜻깊은 광복 40돌을 맞아 첫종을 치게되었다. 이 새종은 단순한 옛종의 복원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 양식과 현대 감각을 조화시켜 만든 예술과 과학의 어우름으로서 약진한국의 슬기와 솜씨가 배어 있으며 면면한 이 나라의 시급한 통일과 무궁한 번영을 축원하는 온 겨레의 마음과 정성이 스며져 있다. 이처럼 이 새종에는 범국민적인 호응과 협력이 있었으나 여기에 그 사실을 일일이 밝히지 못하고 오직 이 일을 맡아 앞장서 애쓴 몇 기관과 몇 분들만의 이름을 아래에 새기어 모든 이들의 공덕을 함께 기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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