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2. 22:12ㆍ일상 (대만 생활 정착기)
사실 오늘 이렇게 먼 거리를 걸을 것이라고 계획을 하고 길을 나선 것은 아니었다. 한달 넘게 평상시 하지 않던 산책으로 하루에 1만보 이상을 걷다 보니 무릎에 무리가 갔는지 아픈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은 불편한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어디로 산책을 나갈지 집을 나서서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청구역 근처에 이르러서야 지하철 6호선 창신역을 지나 동망봉터널 위쪽으로 해서 낙산 공원을 거쳐 한양도성순성길을 타고 흥인지문으로 다시 내려와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방향을 동망봉터널로 잡았다.
터널위로 올라가나 오른쪽으로는 낙산공원으로 향하는 마을버스가 다니는 길이 있었고 직선으로는 엄청난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버스가 다니는 길로 가도 무방하겠지만 계단 끝에 보이는 교회가 우뚝 서 있었고 아무래도 버스가 다니는 길 보다는 지름길인 것 같아서 무릎이 불편한 것을 잊고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올라서 낙산공원쪽으로 조금 걷다 보니 조선중기 실학자 이수광의 집 '비우당'이 있었다. '비를 겨우 피할 수 있는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자주동샘도 바로 근처에 있는데 여기는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가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고 난 후에 생계 유지를 위해 옷감을 물들이는 일을 했는데 샘물 주변과 낙산 기슭에는 옷이나 손에 닿기만 해도 보라색 물이 들여지던 약초 자지초가 지천에 깔려 있었고 화강암 바위 밑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에 비단을 빨아서 자주색 물을 들였다는 곳이라고 한다.
벌써 해는 떠서 멀리 서울 시내와 남산은 햇살을 받고 있다. 남산타워를 보면 자주 사진을 찍는데 프랑스의 랜드마크인 에펠탑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리에 살 때에는 에펠탑 사진을 참 많이 찍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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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따라서 조금 더 걸어가면 낙산공원이 보인다. 오늘 최종 목적지는 바로 여기였다. 분명히 계획은 그렇게 했었다. 낙산공원 안쪽으로 난 한양도성 순성길은 한 번 다녀온적이 있었는데 중간에 길이 끊겨 있고 혜화동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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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순성길의 안쪽은 그랬다. 조선시대로 얘기하면 한양도성의 한양쪽 길은 그랬단 말이다. 그래서 낙산공원에서 잠시 쉬었다가 흥인지문쪽으로 내려가려고 했는데 말이다. 공원입구에 있는 지도를 보니 한양도성순성길 바깥쪽 길은 혜화문까지 연결이 되어 있다고 안내가 되고 있었다. 여기서 집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평상시보다 조금 짧은 거리를 산책하는 것이 될 것인데 혜화문까지 간다면 꽤 먼 길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갈팡질팡 몇 번 했다. 그러다가 낙산이 높으니 혜화문까지는 내리막 길일 것이고 가는 것이 수월하겠다 싶어 오늘의 고행이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내려가는 길은 편안했다. 얼마 걷지 않아서 혜화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측끝에 보이는 것이 혜화문이다.
혜화문은 한양도성의 동북쪽 문이다. 창건 당시에는 홍화문으로 불렸으나 중종때 혜화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근처가 혜화동인가보다. 여기까지는 한양도성의 낙산구간이고 이후부터는 백악구간으로 들어간다. 백악구간은 동북쪽 문인 혜화문, 북문인 숙정문, 북소문인 창의문까지의 구간이다. 오늘 이 구간을 모두 완주하게 될지는 몰랐다.
혜화문에서 가까운 지하철역은 한성대역이다. 되짚어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이왕 걷기 시작한 길이고 한양도성길을 한번쯤은 돌아봐야겠다는 결심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더 걸어보기로 했다. 지난 번에 20km 넘게 산책을 했던 적이 있기에 그다지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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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백악지역 시작부분인 이곳은 한양도성이 훼손이 되어서 없었다. 많은 집들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그 흔적만을 찾을 수 있을 뿐이었다. 사실 많은 도성의 돌들은 예전 것이 아니라 복원된 것이었다. 색깔과 모양을 보면 알아보지 않아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얼마나 걸으면 다시 도성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걸었다. 다음의 사진과 같이 가정집의 석축 아래에 도성의 일부였던 것을 볼 수 있다.
한양도성길 안내표지를 따라가면 드디어 산쪽으로 연결된 도성들이 보이고 계단이 나타난다. 여기서 부터는 북악산에 들어서는 것이다. 계단을 오르는 것은 할만하다. 하지만 내려가는 계단, 특히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는 것은 고소 공포증때문인지 발이 떨어지지 않아 고생을 한 기억이 있다. 하지만 산을 타는데 계단이 많을까 하는 생각으로 걷기 시작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막내 녀석이 숙정문엘 가 보고 싶다고 해서 한참 검색을 하긴 했었는데 산세가 험하다거나 힘들다거나 하는 글들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숙정문까지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 윗쪽을 보니 계단이 있기는 하겠자만 그리 가파르지 않을 것 같다.
한참을 올라가면 성곽의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걷도록 길이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성 안쪽은 군사시설이 있기 때문이다. 헉헉거리며 한참을 오르다 보니 꽤 높이 올라왔나보다 서울 시내가 내려다 보이고 자주 오르던 남산은 낮은 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구간이 나타났다. 생각보다 가파라서 사실 무서웠다. 왜 가파른 계단이 무섭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오르는 것은 전혀 문제없는데 말이다. 계단을 내려오고 나서야 한숨 돌리고 뒤돌아 사진을 찍었다.
계단을 다시 올르고 나니 숙정문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냥 되돌아 갈까도 생각을 했지만 이왕 온거 더 가보자 싶었다. 좀더 걸어가면 군사시설 때문에 출입카드를 받아야만 하는 구간이 있다. 계절별로 입산이 가능한 시간대가 있으니 사전에 확인하고 오는 것이 좋겠다. 다시 남산타워가 멀리 보여 한 컷 추가...
출입카드를 받을 때, 신분증이 필요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냥 출입카드를 나눠줬다. 이걸 가지고 북악구간의 마지막인 창의문까지 갈 수가 있다.
드디어 숙정문이 보인다. 숙정문을 바라보기 위해서 도성 바깥쪽으로 나가서 사진을 찍었다. 사실 뒷쪽은 공사 중이었다. 오늘의 숙제는 하나 완수했다. 막내놈이 보고 싶다고 했으니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보내줬다. 같이왔음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지만 막내는 늦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에 별 수 없었다. 하지만 내려가는 구간에 계단을 겪고 나서는 나혼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촛대바위를 지나서 가다보면 멀리 강남쪽이 보인다. 롯데 타워가 햇살을 받아 희미하게 보인다.
그렇게 청운대를 지난다. 청운대서 다정하게 사진을 찍는 노부부가 보기 좋았다. 백악마루를 지나고 나면 내리막길의 시작이다. 이 계단들 때문에 다시는 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벌벌 떨며 계단을 내려왔다. 내려갈 때는 사진 찍을 엄두도 못 냈고, 중간에 잠시 뒤돌아 사진을 겨우 찍었다. 사진에선 가파르게 보이지 않는게 야속하다. 오를 땐 어렵게 어렵게 올랐는데 계단을 통해 내려오니 그리 생각보다 멀지는 않았다. 계단의 공포 때문에 짧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단을 내려오면 창의문 안내소가 보이고 여기서 출입카드를 반납해야 한다. 반납을 하면 창의문을 만난다. 백악구간이 끝났다. 창의문을 나오면 바로 길을 건너 인왕산 구간이 시작된다. 인왕산 구간을 가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다음 구간은 인왕산 구간이다. 계단의 공포가 끝나지 않아서 그런지 힘이 남아 있어도 오르고 싶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한양도성길 완주를 위해서 오르긴 하겠지만 당분간은 오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한양도성길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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